나의 이야기

나의 어머니

"한 천주교신자" 윤 사도 요한 2018. 12. 16. 00:16

나의 어머니 전기옥 여사님은 자상한 분이셨다.

그녀는 어릴 적 내가 환시를 보았음을 알고 나의 앞길에 파란만장한 그 무엇이 있을 것임을 예견하였나 보다.

그리고 내가 너무 조숙하여 (이 이야기는 할 핑요도 없다. 죽은 강아지를 끌어 안고 피투성이가 된 그 동물을 안고 우는 트럭에 치여 생명이 없는 그 생명체를 안타까와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어떠한 감정을 가졌을까? 나는 그 날 밤 잠을 자다가 울고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부모님은 놀랐고 어린 나에게 그녀는 내가 왜 우는가를 물어 보았다. 나는 답하였다. "어머니, 왜 모든 생명체는 죽어야 하나요?" 그 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 때에 1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김종섭 선생님이 전근을 가게 되자 나는 다시 밤 중에 일어나서 울었다. 이 번에도 부모님이 놀라서 깨어 나셨고 나는 다시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왜 모든 사람은 만나면 해어져야 하나요?"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고 어머니는 내가 너무 조숙함을 걱정하였다. 아미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감정이 동하는 것을 보고 걱정하였다. 

그러한 걱정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까지 가르치신 공은 어머니의 공이 가장 컸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아프신 이후로 우리 가족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애를 썼다.

심지어 새끼무당 노릇까지 하였고,,,

목로주점까지 운영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러한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싫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소송에 휘말려 우리 가족을 남겨 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둘째 누님과 같이 어려운 가족을 살피는 일과 학업을 게속해야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대학에 지원할 무렵 연락이 닿았다.

나는 울면서 이야기하는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냥 눈물만 흘렸다.

"알았어요, 끊으세요. 끊어요...!"


그 뒤 나는 서울에 왔다.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서울 가좌역 근처의 여관에서 하루밤을 자야만 했다.

그런데 방이 없었다.

나는 결국 먼 친척인 한 이모님의 집에서 잠을 청하였고 그 다음날 나는 연세대 공과대학 건물에서 시험을 보았다.

너무 어려웠다.

내가 지금껏 본 시험 중에 가장 어려운 정도여서 나는 떨어진 줄 알고 울면서 눈나리는 교정을 지나서 버스정류장에서 울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도 우셨다.

그리고 나는 간신히 합격을 확인하였다.

장학생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쁜 나머지 나에게 산낙지와 불고기, 아나고회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대학생활 본디 당시의 정권에 불만족하였던 나는 전직대통령의 백담사 행을 바라보면서 매우 분개하였고 나도 학생운동인 개신교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갔고 당시의 전대협의 통일노선과 노학연대 투쟁에 적극동조하였다.

어머니는 그것이 걱정되어서 나를 대전으로 귀양(?)보내시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도 한동안 어머나의 골칫거리였다.


사람들이 왜 내가 당시의 대통령을 싫어하였느냐고 물었다.

나의 어머니가 그 민정당 대표로 나온 그 사람의 선거운동원이었던 때가 있었다.

한 번은 그녀의 품에서 백만원권 다발이 나온 것을 보고 나는 그녀가 관권선거, 금권선거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비난한 바가 있다. 그래서 그 때의 감정이 그 뒤에도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 때의 정권과 모종의 타협을 하고 있었다.

이중간첩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고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그 두 전직 대통령에게 이용당하고 기만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군대에 거의 가지 않아도 될 사유가 있었고 연기하여도 무방하였다.그러나,,,

나는 갔다.

그리고 잘 적응하지 못하였던 때 나의 집안과 세상은 풍전등화의 앞길에 놓여 있었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반토막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나의 집안도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실종되셨고 누나는 입원하였으며 그 뒤 나는 정기휴가 때 나와서 의가사전역을 준비하였다.

부대원들과 간부들은 처음에는 내가 적응을 잘못하자 나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남들은 군대에 가기 전에 체력단련을 한다든가 실컷 노는 것이 관례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여 어절 수가 없이 그를 간병하여야 할 형편이었고 대소변 수발을 하여야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간병을 입대 당일에도 하였다면 믿겨질까...?

나는 그러나 이미 내가 군생활을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복잡하였다.


내가 집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날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나가 보니 그녀는 위병소에서 하얀 소복으로 입고 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나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은 어머니의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셨다.

그녀는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다 말고 나와의 약속, 곧 생일날에 면회를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초상당일 집을 떠나서 부대까지 온 것이다.

나는 엎드려 절하고 나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울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전역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뒤에 제법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학금도 타고 졸업이 다가오자 다시 입대를 준비하였다.

이 변에는 해군장교로 지원하여 진해로 내려가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중병에 걸렸다.

중랑구 기독병원 나는 그 곳에서 3주간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울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그녀를 간병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심장이 멈은 것을 알고 의사는 잠시 인공호흡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깨어나지를 않았고 그가 자리를 뜨자 나는 내가 인공호흡을 하려고 하였다.

의사는 돌아와서 나를 말리며 이렇게 맗했다.

"선생님, 됐습니다. 그만 하세요...!"


그녀의 장례는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지하에 있는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보고 무릎을 꿇으며 통곡하였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약 3주간을 화장실과 식사와 간단한 일을 제외하고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내가 슬픔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였다.

그녀는 기독교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을 기독교신자로 손색이 없이 길러낼 만큼의 성실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자비로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죄인이란 말인가...?

나는 결국 다시금 성경책을 펼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편 1편

http://blog.naver.com/yikshy/221370662099

시편 23편

http://blog.naver.com/sano153/221358318824

시편 131편

http://blog.naver.com/love4bible/220974315922

로마서 16장 25절에서 27절

http://blog.naver.com/agday/80116602543


나는 성경책을 덮고 일어나서 밖으오 나가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이후 전도(전교)를 열심히 하였다. 

새 생활의 시작이었다.


2018년 12월 15일 자정이 지나서

경기도 화성시 병점동에서

블로그 주인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