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50에서 바라본 인생에 대한 반추
이제 50, 지천명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혜롭고 슬기롭고 붙임성이 있는 아이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개구장이 기질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심한 장난으로 주변 사람들을 긴장하게도 하였고 또 너무 조숙하여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한 예로서 저는 어느날 저의 강아지가 커다란 트럭에 치여거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겁도 없이 그리로 달려가서 그 강아지를 안고 피투성이가 된 그 동물을 안고 흐느기고 통곡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자다가 일어나서 울었습니다.
제 방에서 같이 주무시던 부모님은 놀라서 일어나서 저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모든 생명체는 죽어야 하나요...?"
저의 대답은 어머니를 아녀실색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뒤 저는 장수국민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김종섭 선생님을 1학년 담임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시자 그분이 전근간다는 소리가 들렸고 그 날 밤도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왜 모든 사람은 만나면 헤어져야 하나요...?"
그리고 저는 그 밖에도 너무 당돌한 질문과 대응으로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몇 가지 신비로운 체험이 있었으나 여기에는 그런 이야기는 적지 않겠습니다.
중학교 때 저는 잠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한 때 방황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시 학업에 전념하였고 좋은 결과를 얻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회에 상당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세상이었는데 저는 저는 일부러 저녁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부모님과 선생님을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부로 삭발을 하여서 그 당시 나온 주민등록증에는 박박머리의 한 아이가 나와 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때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한 번은 도지사가 준 효행상을 받았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당시 저의 아버지께서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치매를 안고 있었는데 무려 그 병으로 27년을 고생하시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저의 처지를 모르던 저의 친구들은 그저 제가 말잘듣고 곤부 잘하는 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때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싹트고 있었고 점수는 충분히 S대를 갈 형편이었으나 Y대로 진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운동권의 한 서틀인 아가페라는 단체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지금의 상암동(그 때의 난지도 옆)에서 자취를 하며 알바로 돈을 벌게 되고 그 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간병을 하다가 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남들은 그 즈음이면 술 마시고 실컷 논다고 하거나 체력단련을 하게 된다고 하지만 저는 제가 입영하는 날 아침까지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고 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고 저는 보충대에서 헌혈을 잘못하여 아픈 팔을 이끌고 훈련솔로 가서 훈련을 받던 중 결국 쓰러져서 2박3일 간 의무대에 입실하여 치료를 받고 나서 다시 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몸은 아프고 집안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고문관이 되었고 항상 근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안일과 세상 걱정 때문이지요...!
결국 저의 사정이 알려져 저는 부대에서 도움을 받고 나중에 전역을 하게 됩니다.
의가사제대 실역필 보충역이지요. 사실 저의 부대는 최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이었고 저의 집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저의 어머니가 저의 생일에 면회를 오셨는데 눈이 펄펄 내리는데 하얀소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 아버지가 드디어 돌아가셨나 보다 하며 달려가서 엎드려 큰절을 하였습니다.
사실 돌아가신 것은 저의 외할머니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날 새벽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당신의 아들인 저와의 약속을 생각하시어 저에게 찾아오신 것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전역을 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뒤 졸업을 하고 저는 다시 군대에 장교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체력단련과 시험 준비와 소양교육을 하면서 준비하여 당당히 합격하였고 이제 진해의 교육사령부로만 내려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조금 슬픕니다. 저의 어머니가 병사하시게 된 것이죠. 저는 결국 입영을 포기하고 장례를 무사히 치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후일에 육군 하사관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래서 응모하였지만 반려처분을 받았고 저는 국가에 호소하였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전신인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을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반려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먹은 대로 전교와 봉사와 그 밖의 일로 전념하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단체봉사, 개인봉사, 전교봉사 등을 계속하였고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신비로운 일들을 겪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금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에 충실하게 살려고 합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일들을 격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 자세히 적는다면 하나의 훌륭한 수기이거나 문학작품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하루 하루 되심을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