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점성당 시절-IMF 직후와 새로운 생활
나는 반모임의 서기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노숙인들이 별로 수원역에는 없었고 지금처럼 집단으로 노숙인으로 내몰리는 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 내가 노숙인을 돌보았던 일들 중 단편적인 일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나이가 지긋한 수염이 멋지게 자란 한 할아버님이셨습니다.
그는 집에서 아들에게 쫓겨나 병점고가에서 마치 개집처럼 누추한 거처를 두고 나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성당을 오가가나 아니면 병점에서 지날 때 그곳을 자주 들렸습니다.
그리고 빵과 우유를 대접하거나 쌀을 조금씩 사다 드리거나 말벗이 되어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내 힘으로는 안 되겠구나 싶어서 성당에 가서 수녀님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하도 자주 이야기하자 그분은 결국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보았고 그 결과를 알고 싶었습니다.
수녀님은 저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들도 있고 가족도 있으시던데...!"
제가 다시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아들은 술꾼이고 가족은 그 할아버님을 학대하였고 내쫓기다시피 나왔다는 것과 당장 그 움막보다 못한 집에서 살 수밖에 없다. 꽃동네 같은 곳도 가기 싫다고 하시니 조금만 신경을 써달라고 말입니다.
다음 번에 그 할아버님을 보었을 때 할아버님은 고기를 맛있게 잡수시고 계셨고 그 옆에는 각종 반찬과 쌀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원권 지폐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하였으면 나는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 번에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맞았고 그 뒤에는 그 움막같은 곳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마 시골로 내려 간 것이거나 다른 좋은 곳으로 가셨겠지요...!
다음의 한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수원역에서 노숙인들에게 적선을 하다가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재활치료 중이었고 그리고 가끔식 서울 명동에 가고 있었으며 희망근로를 하고 있었기에 돈문제는 별로 겪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제가 이은국 교수님과 자주 이야기를 주고 받던 터라서 서울의 연세대학교에도 자주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원역의 팔달산에도 자주 가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노숙인 한 명과 사귀게 되었고 그는 나를 자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끼에 삼백원 짜리 밥을 먹고 살고 있노라고 하였고 저는 웃으며 그에게 자주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원역에 있던 노숙인들은 그 당시 흡연이 허학되던 장소에서 항상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담배를 피우며 욕을 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그 근처는 사람들이 늘상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이야기는 커녕 만나거나 상대하는 것조차도 피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명권이 형님이란 사람과 자주 만났습니다. 동진이, 그리고 인경 씨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도 잘 알고 지냈고 그들 모르게 노숙인들을 돕고 있는 것을 아마 그 사람들은 당시에 몰랐을 것입니다. 병원에 갈 때 버스에 내려서 남루한 사람 손에 천원권 몇 장과 동전을 손에 쥐어주던 나를 아마 당사자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벼로 싫지가 않았습니다. 술 한 잔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내 주제에 예수님을 믿고 세 생활을 하라고 충고하는 용기도 냈었습니다. 그런 것을 누님들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마 장명찬 선생님이나 당시의 사람들은 일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은국 교수님도 짐작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나는 서울에 자주 가며 한 장애인을 알게 되었고 주로 그와 명동에 있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보니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울역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곳에서 길지는 않지만 전교하고 봉사하였고 개인적으로 기도도 여러번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저도 한 치 앞도 내다 보기가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