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의 일기
즐거움의 기억
이 마라도미나 수녀 / 노틀담 수녀회
아버지는 우리를 잘 데리고 놀아주셨다. 아버지 어깨에 목마를 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동네는 가난으로 꼬질꼬질함에도 참 좋았다. 아버지에게 배운 딱지치기는 우리를 동네 남자아이들의 경계 대상이 되게 해주었다.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엑스레이 필름을 덮는 파란 종이를 가져 오셨다. 종이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우리의 딱지는 무적의 딱지였던 것이다. 여자 아이들 넷 있는 집에 60kg짜리 쌀포대에 딱지가 한가득인 것을 어머니는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세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소임이엇다. 정말 동생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심정이 여러 번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동네 남자 아이들 딱지를 따러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둘째와 살금살금 딱지 한 포대를 메고 윗집 남자 아이들과 대전을 벌이러 쪽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머즈 귀를 가진 우리 어머니는 멀리서 큰 소리로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 "막내 데리고 가라!" 아이고, 막내는 세 살이다. 어디 수준이 맞아야 데리고 놀지! 안 데리고 가면 우리는 나갈 수 없음을 알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막내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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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신앙 때문이었다. 기도가 일상인 분위기에서 자란 우리가 그 위급함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 기도였었다. 이 선택 덕분에 내가 수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께 드린 9살짜리 꼬마 숙녀의 서원은 이렇게 완성되었나 보다. IHS